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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례 이야기

외삼촌의 장기간에 걸친 조카 성폭력, 대법원 "심리적 항거불능 상태 인정될 수 있어" 파기환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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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2021도11938 판결 해설

오랜 기간 외삼촌으로부터 성적 학대를 당한 조카의 사건에 대해 대법원이 중요한 판단을 내렸습니다. 대법원은 피해자가 장기간에 걸친 피고인의 지배와 예속 관계 속에서 심리적으로 저항하기 매우 어려운 상태, 즉 '항거불능' 상태에 있었을 가능성을 폭넓게 인정해야 한다며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다시 심리하도록 했습니다. 이 판결은 친족 관계 내에서 발생하는 성범죄의 특수성과 피해자가 처할 수 있는 복합적인 심리 상태에 대한 이해를 높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사실관계 정리

이 사건의 피해자 B씨는 어린 시절 부모님의 이혼과 아버지의 사망으로 불안정한 환경에서 성장했습니다. 19세가 되던 1999년, B씨는 교통사고로 일을 그만두고 지인의 집을 전전하던 중 14세 연상의 외삼촌 A씨의 도움으로 그가 운영하던 비디오 가게에서 숙식하며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A씨는 B씨가 남자친구를 만난다는 이유로 B씨를 모텔로 끌고 가 폭행하고 강간하는 첫 번째 성폭력을 저질렀습니다. 이후 A씨는 B씨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함께 살게 하면서 경제적으로 예속시키고, 집안일을 시키며 외출 등을 통제했습니다. B씨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욕설을 하거나 물건을 던지는 등 위협적인 행동으로 B씨를 공포에 질리게 하여 절대적으로 복종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지배와 예속 관계는 약 19년간 지속되었으며, A씨는 2015년 5월 3일경을 포함하여 2018년 2월경까지 총 5회에 걸쳐 B씨가 항거불능 상태에 있음을 이용하여 간음한 혐의(성폭력처벌법상 친족관계에 의한 준강간)로 기소되었습니다. A씨는 성관계가 있었던 사실 자체는 인정하면서도 합의된 관계였다고 주장했습니다.

 

소송의 경과

  • 1심: 주위적 공소사실인 친족관계에 의한 강간 혐의에 대해 증거 부족을 이유로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 2심 (항소심 - 대전고등법원): 검사는 예비적 공소사실로 친족관계에 의한 준강간 혐의를 추가했습니다. 항소심 법원은 주위적 공소사실에 대한 1심의 무죄 판단을 유지했고, 예비적 공소사실인 준강간 혐의에 대해서도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항소심 재판부는 B씨가 2015년경부터는 자격증을 취득하는 등 경제적 자립 능력을 갖추었고, A씨의 변태적 성행위 요구나 나체사진 촬영 요구를 거부하기도 했으며, A씨의 폭력도 줄어든 점 등을 들어 B씨가 A씨의 성행위 요구에 항거가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한 상태였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또한, 전형적인 그루밍 성범죄나 학습된 무기력 상태로 보기도 어렵다고 보았습니다.
  • 3심 (대법원): 대법원은 원심(항소심)이 주위적 공소사실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것은 수긍했으나, 예비적 공소사실인 친족관계에 의한 준강간 혐의를 무죄로 판단한 것은 위법하다고 보았습니다. 대법원은 B씨가 장기간에 걸쳐 형성된 심리적·경제적 지배 예속 관계로 인해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하기 어려운 '심리적 항거곤란 상태'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하여,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대전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주요 법리: '항거불능' 상태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

이 판결에서 대법원은 성폭력처벌법상 친족관계에 의한 준강간죄의 '항거불능' 상태에 대한 중요한 법리를 제시했습니다.

  • 준강간죄와 항거불능: 준강간죄는 사람의 심신상실 이외의 원인으로 심리적 또는 물리적으로 반항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한 경우, 즉 '항거불능' 상태를 이용하여 간음하는 경우 성립합니다. 이는 피해자의 소극적 측면의 성적 자기결정권(원치 않는 성관계를 거부할 권리)을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 심리적 항거불능의 인정 범위 확대: 대법원은 특별한 친족관계나 정신적·경제적 지배 예속관계 등으로 우월적 지위에 있는 피고인이 상당 기간 계속적으로 행한 폭력, 성적 학대, 감시와 통제 등의 점진적·누적적 영향으로 피해자가 성적 자기결정권에 관해 자유로운 의사 형성과 결정에 심각한 곤란을 겪는 경우를 주목했습니다. 이러한 지속된 심리적·정서적 억압 상태가 주요 원인이 되어 피고인의 성적 침해행위 당시 그에 맞서려는 대항능력이 현저하게 저하된 자포자기의 상태에 있었다면, 이 역시 심리적 항거불능 또는 현저한 항거곤란으로 인정될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 종합적 판단의 중요성: 피해자가 심리적 항거불능 상태에 있었는지는 ▲피고인과의 관계 ▲구체적인 범행 상황의 전체적인 맥락 ▲피해자의 처지와 관점 ▲성적 접촉의 경위, 계기, 정황, 행위 내용과 방법 ▲행위 반복 기간 ▲피고인과 피해자가 보인 반응의 변화 ▲피해자의 나이·경험 등 특성, 심리적·정신적 상태 ▲피해자의 주변 상황과 환경 등을 종합하여 신중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 친족관계에 의한 성폭력의 특수성 고려: 대법원은 친족관계에 의한 성폭력은 ▲친족 간 신뢰 및 의존 관계 악용 ▲가부장적 문화 속 개인 의사 억압 ▲근친상간에 대한 낙인 효과 등으로 피해 사실을 쉽게 드러내지 못하고 장기간 고착화되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하며, 이러한 사정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판결의 의의 및 해설

대법원의 이번 판결은 장기간에 걸친 친족 내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자가 처한 복잡하고 특수한 상황을 보다 깊이 있게 고려해야 한다는 점을 명확히 했습니다.

  1. 피해자 중심적 관점 강화: 대법원은 19세에 당한 최초 성폭행의 충격과 이후 약 19년간 이어진 피고인의 지속적인 폭력, 통제, 경제적 예속, 심리적 조종 등이 피해자에게 미친 누적적인 영향을 중요하게 평가했습니다. 이는 피해자가 겉으로 일부 독립적인 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내면적으로는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하기 어려운 심리적 억압 상태에 놓일 수 있음을 인정한 것입니다.
  2. '항거불능'의 실질적 판단 기준 제시: 피해자가 일부 경제활동을 하거나, 피고인의 특정 요구를 거부한 적이 있다는 단편적인 사실만으로 심리적 항거불능 상태를 쉽게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오히려 오랜 지배와 예속으로 인해 더 이상 강력한 저항을 할 수 없는 상태, 즉 '길들여진 무력감'이나 '자포자기' 상태에 이를 수 있음을 시사했습니다. 피고인의 폭력이 줄어든 것이 오히려 피해자가 심리적으로 억압된 상태였음을 방증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3. 장기간 지속된 관계의 전체 맥락 중시: 대법원은 최초 성폭행부터 시작되어 장기간 형성되고 고착화된 지배·예속 관계라는 '기본 구조'가 해소되거나 질적으로 변화되었다고 볼 만한 사정이 없는 한, 피해자의 후기 행동 일부만을 분리하여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습니다.
  4. 사회적 경종: 이 판결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가스라이팅이나 그루밍과 유사한 형태의 친족 간 성범죄에 대해 경종을 울리며, 수사기관과 법원이 이러한 범죄의 특수성을 이해하고 피해자 보호에 더욱 힘써야 함을 강조합니다. 피해자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지속적 우울장애, 경계선 성격장애 등의 진단 역시 이러한 장기간 학대의 결과일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결론적으로 대법원은 원심이 피해자의 단편적인 모습에 주목하여 전체적인 맥락을 간과했다고 보았습니다. 이 판결은 장기간 지속된 친족 간 성폭력 피해자의 복잡한 심리 상태와 '항거불능'의 의미를 보다 폭넓게 해석하여, 유사 사건에서 피해자 보호의 중요한 법적 기준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습니다.

 

용어 안내

  • 준강간죄 (準强姦罪): 사람의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의 상태를 이용하여 간음함으로써 성립하는 범죄입니다. 직접적인 폭행이나 협박이 없더라도, 피해자가 저항할 수 없는 상태를 이용했다면 처벌될 수 있습니다.
  • 항거불능 (抗拒不能): 심리적 또는 물리적으로 반항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판결에서는 장기간의 지배와 예속으로 인한 심리적 억압 상태도 항거불능으로 볼 수 있음을 시사했습니다.
  • 성적 자기결정권 (性的 自己決定權): 개인이 자신의 성적 행동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하며, 원치 않는 성적 관계를 거부할 권리를 포함합니다.
  • 주위적 공소사실 / 예비적 공소사실: 검사가 기소할 때, 주된 범죄사실(주위적 공소사실)이 인정되지 않을 경우를 대비하여 예비적으로 판단을 구하는 범죄사실(예비적 공소사실)을 함께 기재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에서 주위적 공소사실은 '친족관계에 의한 강간'이었고, 예비적 공소사실은 '친족관계에 의한 준강간'이었습니다.
  • 파기환송 (破棄還送): 상급법원(여기서는 대법원)이 하급법원(여기서는 대전고등법원)의 판결에 위법이 있다고 판단하여 그 판결을 깨고, 사건을 다시 심리·판단하도록 원래의 하급법원으로 돌려보내는 것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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